제4부 영
제15과 성령과 신자의 영
사람은 타락한 영이기 때문에 새 영이 되기 위해서는 거듭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영은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교할 수 없게 되고,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 안에서 시작하여 중심에서 주위로 퍼져나간다. 사탄은 바깥에서 안으로 움직인다. 하나님은 영에 생명을 주심으로 사람의 어두워진 영을 소생시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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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할 때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옴에 따라 살아난다.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요16:8). 십자가 사역은 적절한 한 위치를 창조하고 구원을 성취하므로 죄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성령의 임무는 십자가가 창조하고 성취한 것을 죄인들에게 계시하여 주셔서 그들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성령이 없이는 십자가 사역은 죽은 것이고, 성령은 십자가 없이 활동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거듭날 때 신자들에게 생명을 가져오시는 것 말고도 그들 안에 거하심의 이후 사역을 수행하신다. 거듭난 신자는 모두 그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의 곤경은 모든 성도에게 같지 않을 수 있다. 근심하게도 기쁘시게 되실 수도 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곳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소생했고, 성령이 거기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이다.
제16과 영에 속한 사람
그의 영이 중생 받아 그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도 여전히 육적일 수 있고, 그의 영이 아직 혼이나 몸의 억압을 받고 있을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승리와 함께 오는 큰 위험은 멸망해가는 죄인으로 남아있는 위험이거나, 구원받은 신자가 되어 육적 신자로 계속하는 위험이거나, 아니면 영적 신자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죄인이 신자로 변하듯이 육적 신자가 영적으로 변할 수 있다. 죄인에게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 기독교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은 육적 기독교인에게 그의 생명을 더 풍성히 주심으로 연적 신자로 똑같이 변화시킬 수 있다. 성령과의 올바른 관계는 영적 신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생각과 정서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지성소이며, 여기서 우리가 성령과 교제하며 그의 교통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인정하고 존경할 때에 우리 존재의 숨겨진 부분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어 그의 생명을 우리의 혼적, 의지적 생활에까지 확대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깊은 기관이 혼과 몸을 지배하고, 성령의 생명을 남들에게 전달할 통로로 쓰일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강화하심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영을 가지면 그 결과로 그의 영은 혼과 몸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생각과 소원과 감정과 의도가 영에 지배되므로 혼은 더 이상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되고, 그 대신 영의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은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의 반대이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직관에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의 모든 삶, 섬김, 행동을 영에 두어 항상 영의 지배를 받고 능력을 부여받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 영의 섬세한 감을 통해 그의 느낌을 표시하신다. 직관이 없이 머리에서 생기는 갑작스런 생각들을 따라서는 안 된다.
인간의 최고의 업적은 영적인 사람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있다. 천사들은 영으로 몸도 혼도 없지만 우리 인간은 둘 다 가지고 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사람은 그의 혼과 몸을 계속 보존할 것이다. 정서와 지성과 의지는 영적인 사람 안에 남아 있지만 직관의 안내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첫째로 그를 전적으로 성화시키시며, 그의 영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둘째로 혼적 생명으로 살지 않는다. 셋째로 영원히 몸을 가지고 있다. 육신과 분리된 영이 아니다. 결국 신령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며, 전인(the whole man)이 속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존재의 모든 기관들은 영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다.
제17과 영적인 일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육체에 내리시지 않는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의 새로 창조된 사람 안의 영에만 내리신다. 하나님께서 속사람인 우리의 영을 성령 안에서 푹 잠기게 해달라고 우리가 간구하면서 동시에 겉 사람인 육신이 살아남게 허용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성령의 힘을 구할 때에 우리 마음을 깨끗이 유지하고 우리의 의지가 깨어있어 원수의 모조품에 속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다음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으며 그를 의지해야 한다.
영적인 일을 할 때 주제넘게 필요나 이익이나 공로에 기초해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성령 자신이 그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임명해서 파송하신다는 것이다. 일의 유일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일을 하도록 파송하시는 이는 항상 하나님이시며, 영적 봉사는 결국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자신이 시작하셔야 한다. 육신의 신발을 신은 자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땅에 설 수 없다. 이로 인한 많은 실패와 많은 낭비와 혼란은 파송을 받고 나서 일하지 않고 사람들 자신이 일하러 나서기 때문이다.
영적 일은 사람의 영에 생명을 주거나 영에 생명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자는 영적 생명에 영양분을 주어 자라게 할 수 있는 일만이 필요하다. 우리의 주의를 바깥사람에게 기울이고 속사람을 등한히 한다면, 우리의 사역은 전혀 헛될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의 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에 입각해서 우리들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혼 생명을 진정 포기하고, 전적으로 속사람에 의존함으로서 우리는 주께서 우리 입을 통해 하시는 말씀이 계속 영과 생명이 됨을 보게 될 것이다.
영적 사역은 변함없이 성령의 흐름과 함께 흐른다. 그것은 이 사역이 주의 기름부음을 받는 의식과 함께 주 안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시작된 일들을 끝도 없이 영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피하게도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영적 기독교인은 기계적으로 된 사역에서는 성령의 관유(anointing)를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어떤 임무가 하나님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벌써 포기됐는데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조직기구 때문에 기독교인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원에 의존하여 수행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참된 영적 봉사에는 그의 타고난 재능과 소질을 완전히 부인해야만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은 모든 노력은 두뇌와 재능과 소질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만다.
제18과 기도와 전쟁
모든 기도는 영적이어야 한다. 비 영적 기도는 실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표명하는 것임에도 기독교인들은 기도를 그들의 목적과 이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하나님은 인간의 최상의 의도와 가장 유익한 전망이나 기대이더라도 물리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인한 일은 사람이 아무리 많은 기도를 드릴지라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직관적 부담만이 우리의 기도의 사명을 정당화시키게 된다. 영에서 시작되지 않았거나, 영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기도들은 신자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할 말을 주심같이 기도할 말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의 전적 연약함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우리 영 안의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영으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또 마음(지·정·의)으로도 기도해야 한다. 영은 기도의 부담을 받는데 반하여, 마음은 그 부담을 기도의 말로 조리 있게 표현하게 된다. 참된 기도는 그 사람의 영에서 감지되고, 그 다음으로 그의 마음에서 이해되고, 끝으로 성령의 힘을 통해 아뢰어진다. 사람의 영과 기도는 불가분리적인 것이다.
온 하루 동안 그가 육신을 따라 행한다면 영을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영적인 사람이 그의 영으로 자주 기도하면, 그의 기도가 그의 영과 마음을 하나님과 계속 조율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영적인 사람들만이 영적 원수의 실상을 알아보고 영적 전투를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새 생명은 그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영적 전쟁에 대비하여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신체적 단계에서는 죄에 대항하는 전쟁, 혼적인 단계에서는 자연적(타고난) 삶에 대항하는 전투, 영적 단계에서는 초자연적 적에 대한 맹공격에 대항해야 한다. 악령이 영적 영역에서 기독교인의 영에 대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그가 다만 영적으로 될 때만 그렇다. 적은 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므로 영적 신자가 그들 자신의 영을 정상 상태로 유지하고, 그것을 자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신체적 감각을 극히 조심해서 관리하고, 모든 자연 및 초자연적인 현상을 세심히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과 악령의 그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설영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일하도록 감동시키시며, 결코 사람의 인격을 제쳐놓고 사역하게 하시지 않는다. 악령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활동하지 않게 하여 자기가 그들 대신 사역하기 위해 사람의 영을 로봇으로 축소시킨다. 성령은 신자의 협력 없이는 활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영적으로 되기 전에는 사탄의 힘과 접촉하는 위험은 없다. 그러나 일단 그가 영적으로 되면, 악한 영이 당연히 그의 속사람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제5부 영의 분석
제19과 직관
영적 기능이 직관, 영교, 양심으로 분류된다. 영을 분석할 때는 이 셋의 기능을 살펴보아야 한다. 영 그 자체는 본질적이며, 개인적이며, 비가시적이다. 영은 그 자체의 영적 실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수행을 위한 다양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속에 있는 다른 일단의 감각을 갖고 있는데 혼적 감각과는 철저히 다르다. 영적 감지를 직관이라 부르고, 추리나 원인 없이 직접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의 통상적 감지는 사람들이나 사물이나 사건들로 야기되거나 드러나게 된다. 신자들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욕구를 따라 행하면 안 된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무언의 소리 없는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이상한 강박관념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도록 우리를 매우 강권하고, 움직이고 압박하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영의 직관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안다. 영은 알고 마음은 깨닫는다. 아는 것은 직관의 작용이고 이해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 안의 알게 하는 감을 우리가 자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우리 영 안의 성령의 생각을 아는 것이다. 이제 나는 알았다고 하는 경험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영의 직관에서는 알지만, 우리 혼의 마음에서는 그의 인도하심을 이해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주하는 기름 부음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영적 분별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죄가 있고 또는 아둔하든 관계없이 모든 신자의 영에 그의 영을 넣어 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과 아닌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신다.
우리의 직관으로 사물을 아는 것을 성경에서는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는 성령이 어떤 특정한 문제를 신자의 영에 보이심으로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 계시가 없으면 기독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의 계시를 그의 영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신앙은 시험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인의 삶에서 그것이 직관의 계시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다. 영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람의 영에만 계시하시므로 거기에 계시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 영 안의 하나님의 계시는 직접적인 것과 구하여 얻게 된 계시의 두 종류로 되어 있다. 직접계시는 하나님이 신자가 행해야 할 어떤 특별히 바라는 바를 가지시고 그것을 그의 영에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것을 계시해 주신다는 뜻이다. 구하여 찾는 계시는 신자가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그의 영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통해 응답을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초신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는데 참을성이 없어서 자신의 변장된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대신해 버리므로 그의 양심의 질책을 받게 된다. 이것은 영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에서 전용된 것만이 영적 지식이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지적인 종류이다. 그의 지식과 판단은 직관적이다. 직관은 모든 영적 존재들의 공통된 기능이다. 천사들은 그들이 직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아는 것을 순종한다.
제20과 영교
우리는 몸을 통해 물질세계와 교통하고, 영을 통해 영적 세계와 교통한다. 영적 세계와의 교통은 영이나 직관적 기능으로 된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친교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그의 본성과 같은 본성을 가져야만 한다. 고상한 감정이나 느낌은 사람들을 영적 실상 속으로 이끌어 오지 못하며, 하나님과 개인적 영교를 이루어주지도 못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보다 더 깊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영의 직관에서 체험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신 고린도전서2장10절 말씀은 성령이 모든 것을 탐색하신다는 것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성령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신다. 계시는 우리의 생각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다. 아무도 사람의 영 외에는 사람의 생각을 모르므로 아무도 성령 이외에는 하나님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일들을 아시므로 우리가 이런 일들을 알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세상의 영은 하나님과의 영교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은 하나님과 영교 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중생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알기를 바랐다. 이것이 기도를 통해 활성화 되는 신자의 영의 숨은 기능인지, 기도의 결과로 성령에 의해 신자의 영에 첨가된 그 무엇인지는 우리가 모른다. 하지만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은 기도를 통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21과 양심
우리의 영은 직관과 영교의 기능 외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를 불안하게 할 만큼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직무의 기능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양심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성결이 악을 꾸짖고 선을 옳다고 하듯 신자의 양심은 죄를 책망하고 의를 시인하게 한다.
양심은 혼수상태에서 나올 때마다 그것은 죄인을 정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양심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힘이 없다. 직관과 영교의 죽음은 양심의 죽음보다 더 커 보인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마자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직관과 영교는 완전히 죽었다. 그러나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은(이것이 양심의 기능인 바) 증가했다. 죄인의 직관과 영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죽어있지만 그의 양심은 그 활동의 일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피가 우리 양심에 흘려졌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은 하나님과 영교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 기관들을 가지고 혼적으로 가까이 나가지 않는다. 중생한 영만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그의 양심에 세미한 가책조차 가져서는 안 된다. 양심의 단 한 가지 범죄도 하나님과 영교에서 직관의 정상 기능을 억압하고 중단시킨다.
신자의 양심은 그의 영이 중생할 때 소생한다. 사람 속의 성령의 성화 사역과 양심의 사역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다.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 성화 사역을 위한 첫 단계이다.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전진할 적에는 양심의 증거와 성령의 증거가 결속을 굳히고 일치단결한다. 이것은 양심이 성령의 소리에 완벽하게 조율되기까지 전적으로 성령의 지배 아래에 있으므로 날마다 더 민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그들의 양심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게 된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롬9:1) 라고 한 사도의 말씀은 그 속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양심의 증언에 대해 말씀해 주는 구절이‘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1:12)이다. 죄과(offence) 없는 양심만이 신자를 위해 증언할 수 있다. 우리는 양심이 우리를 어떻게 증언하는지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에 거하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양심이 지식에 제한을 받게 된다. 양심은 선악을 구별하는 기관이며, 양심이 우리에게 선악의 지식을 준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두 지키고, 하나님께 정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즐길 자격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보시지 않고, 그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신다.
우리가 정직하게 구하고 그가 바라시는 것을 온 마음으로 순종하면, 우리 안에 알지 못하는 죄가 많이 있어도 우리의 교제는 중단되지 않는다. 교제가 하나님의 성결에 따라 결정된다면 과거나 현재에서나 매우 거룩한 성도들이더라도 하나님과 한 순간의 완전한 영교를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알려져 있지 않은 죄는 그의 고귀한 피로 덮여 있는 것이다.
제6부 영을 따라 행함
제22과 영적인 생활의 위험
영적 법칙에 따라 영적으로 살아가면 성령의 역사를 매일 체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의식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지적인 자각이 없는 사람으로 땅 위에 살게 하려고 하시지는 않는다. 혼의 지각과 영의 직관은 뚜렷이 정반대이지만 이 둘은 아주 비슷해 보인다. 그 비슷함은 기독교인들을 혼란시킬 만큼 가깝기 때문에 속임 당함을 쉽게 피할 수 없다.
사탄은 성도의 삶을 혼에 제한시키고, 그의 영을 침묵시키려 노린다. 사탄은 이런 감각과 생각들로 신자의 영적 지각을 혼란시킬 작정이다. 이것들로 혼란해지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으로 인한 것과 혼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게 된다. 사탄은 신자들이 영을 따르는 대신 혼으로 살아가도록 그들을 꾀는 일보다 심지어 더 과감한 수단을 쓰기도 한다. 그들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살아감을 통해 겉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유혹하는데 성공하면, 사탄은 다음으로 자기가 그들 안의 한 영처럼 가장하는 단계를 취한다.
그는 그들 마음속에 지금 하나님이 새로워진 마음을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은폐하고, 그들의 영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을 교묘히 은폐해 버린다. 사람의 영이 활동을 중단하는 즉시 성령은 그 안에서 어떤 협력적 요소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어, 참된 영적 생활을 계속 체험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 모든 행동은 영의 직관적 지식이 시인하는 것만을 허용되도록 하기 위해서 영적 통찰로 세밀히 조사해 보아야 한다.
사탄은 영의 직관의 인도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그의 양심에 온갖 종류의 고발을 허위로 거짓되게 상상하게 한다.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거짓된 양심의 고발을 만들어 낸다. 신자들의 문제는 악령의 고발과 양심의 질책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 악령은 그들이 죄를 지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죄를 범하면 즉시 하나님 앞에 자복하여 그 귀중한 피의 정결케 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고발의 목소리가 계속되면 그것은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의 혼이 우리를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그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느끼게 할 때가 많다. 혼적이거나 신체적인 것을 영의 직관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위험성은 다른 감을 영의 직관으로 오인하는 것이며, 직관의 의미를 오해하는 위험이다. 직관만 따르고 성경과 관련시키지 않는 것은 우리를 틀림없이 잘못 인도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영으로 감지된 성령의 계시는 성경의 성령의 계시와 일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전적으로 영으로 행하고 살아야만 할 이유는 우리의 영이 성령의 거처가 되므로 그가 그의 마음을 표시하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부터 이탈되면 쓸데없게 된다. 사람의 영과 성령의 순서가 뒤 바뀌게 해서는 안 된다.
제23과 영의 법칙
하나님의 자녀는 영을 따라 행하는 생활을 위한 조건으로 그의 내적 존재 의식 속의 감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독교인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법칙(8가지)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활발히 작용하지만 등한히 하면 손실을 받는다. 영이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영의 짓누름(중압)
영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을 짓누르고 마음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기쁨과 가벼움을 빼앗아 갈 뿐만 아니라, 그의 영이 성령과 함께 사역할 수 없게 하고, 영을 괴롭히는 원수로부터 오는 것이다.
(2)영의 봉쇄
영은 표현을 위한 기관으로 혼과 몸이 필요하다. 혼과 몸이 적의 공격을 받아 그 정상 상태를 잃으면, 영은 닫혀 지고 어떠한 출구의 수단도 거부당한다. 그 기간 동안은 그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정서는 어지럽혀지고, 그의 의지가 지쳐져서 전 존재를 능동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되고, 그의 몸이 지나치게 피곤해지고 잠시 나태하게 된다. 이런 징조에 즉각 저항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이 봉쇄되고 전투할 수 없게 되어 승리를 유지할 수 없다.
(3)영의 중독
우리의 영은 악령에 의해 중독 될 수 있다. 누구든 반대나 의문을 품지 않고 그에게 오는 모든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당연히 그 자신의 느낌임을 기정사실로 여기면 극히 위험해 진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든 결코 경솔하게 받아드리면 안되고 모든 관념과 느낌의 원천을 살펴보아야 한다. 가끔 사탄은 우리의 화를 자극하여 우리 영을 강퍅하게 한다. 그것은 뻣뻣하고, 양보가 없고, 편협하고, 이기적으로 될 수 있어서 신자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게 되고 동정적이고 인정어린 느낌을 저버리게 된다.
(4)영의 침몰
영이 침몰하거나 가라앉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 때문이다. 자기가 경험한 모든 체험을 독점하고 싶어 하거나, 어둠의 세력의 침입 때문이거나, 기도와 예배에서 자기중심적인 것 때문에 유발될 수 있다. 영이 혼속에 잠기는 것은 사탄의 기만 때문이다.
(5)영의 부담
영의 부담은 영의 짓누름과는 다르다. 이것은 신자에게 그의 뜻을 나타내어 그가 하나님과 협력하게 하려는 바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영의 부담은 그가 일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도록 그를 부르시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녀에게 오는 것이다. 영의 짓누름은 압박하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6)영의 쇠퇴
영 안의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이 혼적인 사람은 대체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 그의 영적 생활이 밀물을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조하거나 무미건조할 때는 썰물을 타고 있다고 느낀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즉각 기도하고 곰곰이 묵상하고 원인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다리며 그의 영께서 그 이유를 계시해 주실 때까지 구해야 한다.
(7)영의 무책임
사람의 영은 전구와 같다. 성령과 접촉할 때는 그것이 빛이 나지만 단절되면 어둠 속에 빠진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건강하고 고요한 상태로 유지하여 성령과의 협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단 그의 영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신자는 원수의 모든 작용과 작용의 원인들에 지체 없이 대항·대비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는 그의 환경과 가정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일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놓고 기도해야 한다.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한 후 그의 영이 해방감을 감지할 때 적의 공격에 대한 원인을 격리시키면 신자의 영은 자유로워지고 그 기능은 회복하게 될 것이다.
(8)영의 여러 가지 상태
신자가 영으로 살기를 소원하면 영의 모든 법칙을 알아야 한다. 영이 사람의 혼과 몸에 대한 권한을 가져 그 안의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가장 큰 힘을 가져야 하므로 자기 안의 상황의 여부를 알 필요가 있다. 영의 상태를 4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영이 압박을 받아 쇠약하여 기울어져 있다. 둘째로 영이 강요당하고 있고, 과도한 활동을 강요받고 있다. 셋째로 영이 죄에게 진지를 내주어 영이 더러워졌다. 넷째로 영이 제 자리를 잡고 있어 고요하고 단단하다.
제24과 영을 돕는 마음의 원칙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하면 영을 돕거나 보조하는 마음의 원칙이 있다. 영의 상태가 정상적이면 우리는 거기에 입각해 행하고, 그것이 비정상적이면 우리는 그것을 정정할 수 있다. 영이 잠들어 있을 때는 우리의 마음이 영의 일을 해야 할 때이다.마음과 영은 단단히 밀착되어 있어서 이 둘은 서로 돕게 되어있다. 영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때가 많다. 영이 활동하지 않으면 마음이 그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움직여지면 신자는 영을 따라야 한다. 이렇게 마음에 의한 영의 자극 내지 유도를 우리는 영의 보조하는 마음의 원칙 또는 법칙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식을 알기 위해 우리의 영적 지각을 사용해야 하지만, 후에는 우리가 마음을 통해 이 지식을 유지하고 사용한다고 하는 영적 생활의 한 원칙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영은 조금도 기도할 것 같지 않는 느낌이지만 당신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모든 필요는 기도하라는 요청이다. 기도를 계속함에 따라 당신 안에 무언가가 떠오름을 곧 의식하게 되면 당신의 영이 이 기도 사역에 마침내 가세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한때 받은바 기억되는 진리로 기도하고 그 기도에서 어둠의 세력을 격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영을 감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런 정신적 활동은 마침내 우리의 영이 움직이도록 자극하게 될 것이다.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하는 협력은 영적 생활의 정상 상태를 묘사하게 된다.
중보기도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영은 움직이지 않으며, 중보기도를 위한 제목을 우리에게 주지 않을 때가 많다. 이때는 우리가 마음으로 중보기도 하고, 영이 이 일에 활성화되어 참여하도록 바라고 기대해야 한다는 암시인 것이다. 동시에 당신의 지 교회에 특별히 부족한 것이나 그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시험이나 어떤 특정 지역에서 주의 사역의 어떤 장애물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늘 알아야 할 어떤 특별한 진리가 회상되면 그 대목에서 당신이 그 일을 주목하게 됨에 따라 각각을 위해 중보기도 해야 한다.
잠시 기도한 후 당신이 아직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에 당신의 영이 응하지 않으면 주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되고, 어떤 문제들을 간단히 언급할 때면 성령께서 당신에게 기름 부음을 주시고 당신의 영이 반응하는 것을 느껴지면 주의 마음에 있는 것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직접 인도하심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 안에 움직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뜻을 알 수 있게 해 주신다. 삶의 다양한 사건들에서 하나님은 많은 일들을 우리에게 반드시 직접 일러 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에서 인도해 주시도록 우리의 마음으로 구해야 한다. 기도와 생각해야 할 문제가 그의 마음으로부터 떠오르더라도, 얼마 안 되어 그의 영이 기도와 생각해야할 사항에서 협력하게 될 것이다. 영에 대한 마음의 관계는 물 한 컵과 물 펌프기의 관계인 마중물과 비슷하다. 영을 위해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 것은 먼저 물 한 컵을 붓지 않고 펌프질을 한 후 물이 없다고 결론짓는 사람과 같다.
마음이 영보다 열등하더라도 마음은 영을 보조할 수가 있고, 영의 생각을 읽고 탐색할 수 있다. 적은 우리가 마음이 영을 시중들게 하지 못하도록 자극하여 연약한 때에 영을 강화시킬 수 없게 만든다. 성령은 영을 통해 마음에 빛을 나누어 주고 마음이 지나치게 혹사당하면 그의 빛을 받는 힘을 포기하게 된다. 적은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면 우리의 전 존재가 어둠에 들어가게 됨을 안다. 머리가 많이 생각하고 염려하고 고뇌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지나치게 골똘하면, 견딜 수 없게 되어 그 정상 기능을 제한하게 될 것이다. 마음(지·정·의)을 한결같고 안정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제25과 영의 정상 상태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켜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하고 주를 믿을 때에나 죄에 빠졌을 때에만 참회의 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항상 뉘우치는 상태로 유지하기를 바라신다. 항상 겸손한 영이 되어야 하고, 항상 죄에 대한 슬픔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런 영에서 느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영이라(시51:17). 상한 영은 하나님 앞에 떠는 영이다. 상한 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회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겸손한 영은 자기의 자아를 경멸하지 않는다. 신자의 영이 오만해지는 즉시 그는 넘어지기 쉽다. 겸손은 하나님을 향하고, 사람을 향한다. 겸손한 영은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 나타나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영적으로 겸손한 삶에서 나타난다.
육신이 끈기 있게 주와 함께 수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의 열심은 영구적 특성이다. 이 영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을 끝없이 섬길 자격이 있으므로 육신의 모든 열심을 피해야 한다. 대신 우리의 속사람을 영구히 열심 내게 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자기를 향해서는 상한 영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영이 있어야 한다. 그는 그 자체로서나 어떤 기쁜 경험이나 일, 축복, 환경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그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기뻐한다. 우리의 영이 근심과 중압과 슬픔으로 짓눌리면 무책임해지고, 가라앉고, 제자리를 잃게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없게 되고, 그 민첩함과 자유와 밝음을 잃게 된다.
누구든지 영적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의 영을 거룩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거룩하지 않은 영은 사람들이나 사물에 대해 무절제한 생각, 남들의 악을 평가하고, 사랑이 없고, 수다스럽고, 날카로운 비평, 자기 의, 간청 거절(사정 외면), 시기, 자만 등 이 모든 것들이 영을 더럽힐 수 있다.
우리의 영이 혼과 몸을 지배할 만큼 충분히 강해야 한다. 우리는 영이 그 지배력을 잃는 것을 느낄 때가 수없이 많다. 영이 강해질 때 직관과 분별력이 증가한다. 영을 따라 행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부는 그들의 속사람이 혼과 몸을 지배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의 영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 영은 점점 더 강해질 것이며 성령께 걸림돌이 되는 것을 모두 제거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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