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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원리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마지막 제10부 몸

by deuga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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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과 신자의 몸

우리의 신체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의 직관과 영교와 양심이 아무리 건강하고, 우리의 혼의 정서와 정신과 의지가 아무리 새로워졌더라도, 우리의 신체가 우리의 영과 혼처럼 건강하지 않고 회복되지 않으면, 영적인 남자와 여자들로 발전할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특이하고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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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로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8:10).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므로 우리 안에 그의 거처를 만들러 들어오실 때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된다. 성령은 우리 몸에 생명을 주신다. 이것은 우리가 병들었을 때 주께서 회복시켜주실 것이며, 우리가 병들지 않을 때는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몸은 주를 위하여 있으며’(고전6:13) 이 한 마디는 먹고 마시는 문제이다. 사람은 시초에 이 음식 문제로 타락하였다. 주께서 사용해주시도록 그들의 몸을 적당히 유지하도록 먹고 마시지 않고, 그들의 개인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에 탐닉하였다. 우리는 쾌락을 위해 몸을 사용하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 합법적인 성관계에서도 지나친 것을 역시 금하고 있다 의의 도구로서가 아니면 몸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몸에 속하는 온갖 신경의 반응과 기분, 행동, 행실, , 음식, 연설이 철저히 주를 위한 것이 아니면 그들이 성숙에 도달할 수 없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께서 그들의 영과 혼만을 구하러 오신 것으로 알고, 몸은 쓸데없으며, 영적인 생활에 가치가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는 것이다. 주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도 몸의 부활이 될 것이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은 성령의 거처가 영을 넘어 몸에까지 확대됨을 가리킨다.

 

성령이 우선적으로 우리 몸들에 내리실 것으로 우리가 기대한다면 우리는 속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며,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성령의 인 치심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임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이기주의와 자아 사랑과 죄에서와 연약과 질병과 고난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실 때에 그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40과 병

1.병과 죄의 관계

병과 죽음은 대체로 죄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병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다. 질병의 원인은 인류에 관한 한 어떤 병은 죄로부터 오기도 하고 안 그럴 수도 있다. 병이 날 때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지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우리들 자신을 검토해야 한다. 특정의 죄를 고백하는 즉시 병이 떠나간다. 이것은 의학적 설명을 초월하는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용소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 후에 치유를 구해야 한다. 죄를 고백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병은 사라진다. 대체로 병은 죄에서 생기고, 개인적으로도 병은 죄에서 생길 수 있다.

2.주의 일과 병

주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시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지상 생애를 전파하셨고 치유하셨다. 사역의 목적은 죄의 결과인 병을 정복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시는 것과 그가 우리 질병을 처리하시는 것에는 근본 차이가 있다. 죄는 철저히 무제한적으로 처리된 반면 병은 다만 제한적으로 처리되었다.

3.병에 대한 신자의 태도

신자가 병에 걸릴 때마다 주 앞에서 불순종했는지, 어딘가에서 죄를 지었는지, 누구에게 빚을 지었는지, 어떤 자연법을 범했는지, 어떤 특수 의무를 등한히 했는지 살펴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평소에 자아로 가득한 사람들은 병이 나면 서둘러 의사를 찾거나 병이 낫기를 바라거나 치료할 생각부터 하는 것이다. 병이 당신에게 어떤 교훈을 가져오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주와 함께 더 동행했다면 이것에 적의 공격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징계 문제가 당신의 불건강한 상태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욱 거룩하고, 부드럽고, 또는 더 고분고분하게 만드시기 위해 병으로 징계하신다.

4.치유를 구하는 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치유를 구할 때 마가복음의 세 문장은 배워둘만 하다. 첫째 문장은 주의 능력에 대한 것이다. 병에서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다거나 할 수 없다는 것에 있지 않고 네가 믿느냐, 않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주님의 의지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다. 셋째는 주의 행동이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과 원하심과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신자들이 치유를 다만 기대하는데서 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과거를 다룬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원하시고, 하신 것을 선언할 수 있다.

 

41과 몸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한 때는 육신으로 사셨던 것 같이 오늘에 우리 안에 사신다. 우리의 몸에는 두 가지 힘이 작용하고 있는데 우리를 죽음으로 가까이 이끌어가는 소모가 있고, 음식과 휴식을 통한 보충이 있다. 최선의 방책은 죽음과 생명의 두 힘을 균형에 맞게 유지하는 데 있다. 그들은 주와 함께 행하고, 다른 사람들의 짐을 지고, 형제들과 공감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그 앞에서 중보기도 하며, 어둠의 세력과 싸우며, 그들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기 때문에 음식과 휴식만으로는 그들의 신체의 힘의 손실을 보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다만 주 예수의 생명만이 충분한 것 이상으로 우리의 영적 생활과, 일과, 전쟁을 위한 신체적 필요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준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생명과 능력을 영에 국한하지 않고 몸에도 적용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병을 고치는 데만 아니라 우리를 강하고 건강하게 보존하는 데에 적절하다.

 

하나님의 치유는 우리 병을 치료하시는 것과 우리로부터 질병을 억제하심을 포함함으로 우리를 튼튼하게 하실 수 있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여 아무것에서도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우리 몸에 대한 힘이 되시는 그의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여호와가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가시로부터 온 연약함도 바울을 떠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연약한 몸을 충만케 했고, 그에게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힘을 주었다.

 

주는 우리 몸의 모든 신경, 모든 혈관, 모든 세포를 그의 힘으로 넘치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순간순간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많은 분량의 체력을 주시므로 우리가 다시는 고통을 당하거나 병들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를 우리 몸을 위한 생명으로 영접하는데 필요한 것은 항상 의지함이다.

 

42과 죽음을 극복함

이스라엘, 다윗, 엘리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 바울, 에녹과 엘리야 등은 죽음을 극복하는 완벽한 실례들이다. 죽음에 대한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면 한 원수를 정복하지 못한 채 남겨두게 될 것이다. 땅은 저주 아래에 있고, 저주에 지배받고 있다. 이 땅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죽음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을 그냥 하나의 결정적 단계나 전환기로만 봐서는 안 된다. 이 땅의 장막집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의 연장된 작용의 전환기적 완성인 것이다. 사망은 영, , 몸에서 왕 노릇한다.

 

오늘 죄 문제로 너무 몰두하여 죽음의 문제를 사실상 잊고 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의 극복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죽음으로부터 구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났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를 의로 대신하고, 죽음을 생명으로 대신한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항의 태도로 그들의 태도를 변화시켜 수동적 접근을 던져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정복할 수 없고, 조롱을 받고, 마침내 결말이 오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에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이 적절하다.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길은 우리의 일이 완수되기까지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을 믿음으로, 죽음이 오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주가 오실 때 우리가 휴거될 것이므로 우리가 죽음에서 완전히 구출된 것을 믿음으로이다.

 

주와 협력하며, 죽음에 저항하며, 우리는 곧 주님이 그의 생명으로 죽음을 삼키심을 향해 움직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셨고, 유대에 다니지 아니하시고 갈릴리에서 다니셨고,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 메시야가 죽을 시간이 정해져 있음을 그가 아셨기 때문에 세 번씩 죽음에 저항하셨다.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이 반드시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죽음을 통과함에서 그들의 주님처럼 죽음의 두려움을 품을 필요가 없다.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그가 속히 재림할 것을 구해서도 안 된다. 죽음의 고통, 어둠과 고독은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다. 죽는 것도 유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죽음에 대한 승리는 실제적이며 완전했다.

 

주 예수의 재림 때 살아서 휴거할 사람이 많을 것을 안다. 이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마지막 방법이다. 주 예수의 오심이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으므로 살아서 휴거될 우리의 소망이 우리의 선배들보다 더 크다. 주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살아서 휴거되기 위해 살아있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들은 대다수가 주를 부활로는 믿으나 그가 동시에 생명이심을 잊어버린다. 우리가 죽은 후에 그가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을 우리는 쉽게 인정한다.

 

신자들은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경험하고, 앞으로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즐거워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죽었다가 이어 부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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