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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원리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 제2부 육신

by deuga 202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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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은 10부로 되어있습니다. 이번에는 "제2부 육신"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5과 육신과 구원

육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바사르이고 헬라어는 사르크스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자주 발견되며 그 용법은 각기 다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용법은 바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켜 말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혼은 사람의 인격과 의식의 자리이기 때문에 사람의 영을 통하여 영적 세계에 연결된다. 혼이 영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그의 뜻과 연합될 것인가 아니면 몸과 물질세계의 모든 유혹에 굴복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 한다. 인간이 타락하자 혼은 영의 권위에 저항했고, 몸과 그 정욕에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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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6절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고 되어 있다. 사람은 점진적으로 육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육으로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세상적이고, 도덕적이고,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계속 육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육에 속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서 태어난 비중생인은 육신이며, 육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8:8)’에서 할 수 없다는 말씀은 육신의 속한 자의 운명을 확정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을 철저히 부패한 것으로 보셨다. 하나님은 육신이 변화되거나 개선되거나 좋게 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신다. 그 대신 육신을 죽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사람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육신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라고 권면한다. 죄를 전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신자는 한 순간만이 필요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지셨지만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셨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라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하여 벌써 내주 하시는 성령을 받는 사람도 그 안에 여전히 육신을 갖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처리하고, 성령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아를 처리하시는 것이다.

 

6과 육적 신자

성서적 중생은 사람의 가장 내면의 부분인 깊이 숨겨진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워지고, 성령이 거하시게 되는 하나의 출생을 말한다. 이 새 생명의 힘이 외부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는 아직 죄의 악함과 자아를 더욱 알게 될 기회와 하나님의 뜻과 영의 길을 더 알게 될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애기들은 대체로 육적이다. 성경은 새 기독교인들이 즉시 영적으로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육에 속한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고전 3:1-3). 육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은 오랫동안 갓난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난 것은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과 동시에 마땅히 그가 이미 구주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성령께서 육체의 권세에서 그를 해방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이것을 모를 때에는 육에 속한 상태에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영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고린도인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의 뛰어남을 자랑했다. 우리가 알듯이 당시 여러 교회들 가운데 가장 지식이 있는 교회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으로만 알았을 뿐 체험하지 못 하였다. 그들의 머리로만 생각했을 뿐 마음으로 믿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리는 머리가 좋아서도, 열망이 있어서도 믿어지는 것이 아니며, 믿고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은 있었으나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한 증거 중 하나가 그들이 분쟁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이 바울의 제자인 것, 자신이 아볼로의 제자인 것을 자랑하며 서로 다투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영에 속한 사람은 분쟁 가운데 휘말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는 성령의 열매를 거두는 법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5:19-21에서 혈육의 죄의 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이 육신의 일들을 다섯 집단으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같은 몸을 더럽히는 죄. 둘째로 우상 숭배와 주술 같은 사탄의 세력과의 사악한 초자연적 교제, 셋째로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 같은 사악한 기질과 그 특유의 기벽, 넷째로 이기심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투기와 같은 분파와 당파주의. 다섯째로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음란이다.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육에 속한 자이다.

 

7과 십자가와 성령

하나님은 육신의 일들에 관심이 없으시고, 육신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다. 성도들은 자신의 정과 욕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믿어야 하며, 연약하여 또 넘어지더라도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장차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라고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못 박았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항상 사단의 유혹에 약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도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때로는 성령님이 내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므로 승리를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겸손하게 신앙생활에 임해야 한다.

 

우리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우리는 믿었고 인정했으므로 이제는 우리의 주의를 경험의 문제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완성된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의 죽으심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우리들의 영 안에서 하나의 성취된 사실임을 의미한다. 그가 주의 죽음에 완전히 합치되기를 소원한다면, 그의 영 안에 실재하는 것이 그의 몸에서 수행되게 하여 그의 지체들의 행위를 끊어야 한다.

 

육신의 존재에 대하여 육체가 우리로부터 근절되었다고 생각하고 죄의 성품이 완전히 멸절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중생한 생명이 육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육신으로 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육적 성품은 신자 안에 항상 거하므로 활동할 기회가 오면 즉시 행동할 것이다.

 

8과 육체의 자랑

육신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므로 영과 성령에 반대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영과 성령에 대항한다. 혼은 사람의 본질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자아이며, 의지, 지성, 정서의 기능을 포함한다. 자아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단순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힘에 의지함으로서 성령을 반대하고 소멸하는 것이다.

 

육신이 확실히 죽었다면 선과 악을 행하는 신자의 두 가지 능력도 그것과 함께 파멸됐을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림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육신에 의한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도 때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그가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예배에 참가할 수도 있고 남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은 무익하니라.”(6:63)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상태에서 행한 모든 육적인 일은 무익한 것이다. 우리의 영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할 때 유익한 것이다.

 

신자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선한 일과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이제는 자신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해져서 남을 비판하고 자신보다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그렇게 겉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생각하며 즐긴다. 사도바울이 주장했듯이 이들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자들인 것이다.

 

육신이 의롭게 행할 힘을 주는 것과 같이 죄 지을 힘도 당신에게 준다. 선한 행동이든 악한 행동이든 모든 것은 같은 육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이 죄를 지을 지회가 제공되지 않으면 육신은 선을 행하고 싶지 않지만 선을 행하려 할 것이다. 일단 선을 행할 기회가 제공되면 육신은 곧 죄짓는 데로 되돌아갈 것이다.

 

9과 육신에 대한 신자의 궁극적 태도

하나님의 육신관은 신자들이 육체대로 아무리 갈망하더라도 모든 것이 무익하다고 선언한다. 로마서는 육신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8:6),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8:7),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체를 신뢰할 때 우리를 고난의 길을 통과하도록 하신다. 우리가 고통을 통과할 때 자신의 육체를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이 필요한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겉으로 겸손한 척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을 믿는다.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이 사단의 시험에 당하도록 허락하신다. 이러한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 슬퍼하거나 하나님을 원망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내가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기도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강화시키고자 기도하면서 성경말씀에 가까이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통하여 육신의 죄에서 해방 받듯이 같은 십자가로 육신의 의로부터 해방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라(8:4)이다. 십자가와 저주는 얽혀 있다.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줄 때 우리는 그것을 저주에 넘겨주게 되고,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저주 외에 아무것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육신의 모든 애정과 소원과 생각, 지식, 의도, 예배와 일은 십자가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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