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의 원리

복음이란 무엇인가?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by deuga 2023. 9. 25.
반응형

이번은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에는 "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1장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1.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하나님의 나라' 라는 이 표현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유대문서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구약과 유대교에 존재하고 있던 개념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한 중심사상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의와 평화, 자유와 풍요가 있다고 믿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내용적으로는 구약과 유대교에 배경을 두고 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네 가지 전제들

)창조사상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우주의 창조자로서 온 우주의 통치자이며, 왕이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하늘을 자신의 거처지로 삼으시고, 땅에 아담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 이는 인간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뜻(1:28)이며,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부왕이다.

)타락사상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땅을 통치하려 하므로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사단은 아담에게 자기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아담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했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단의 통치 아래로 떨어졌다.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 용어로 교만이며, 창조주에게 의존하거나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교만한 행위다. 이것은 아담이 자신의 창조주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였다.

신학은 이것을 라고 한다.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누리며 살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내재의 자원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에 속박되어 있고,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게 된다. 또 장소의 제약 속에 갇혀 있어서 부자유하고,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불안하고, 모든 문제들 속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있다. 이렇게 불안, 병고, 압제, 빈곤, 갈등, 죽음 등 모든 형태의 고난이 온다. 실존의 모든 형태의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격리된 결과로 죽음이라는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증상들과 고난이 더 이상 없는 온전한 삶이므로, 구원은 단순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 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5:2129). 구원을 현재적 삶과 구분하여 영생이라고 한다(5:24). ‘영생이란 원래 히브리어 오는 세대의 삶이라고 하고, 그 뜻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오는 세대’, 곧 구원의 시대의 삶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한 전제는 자만의 삶을 살려고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간이 사단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에 처해 있다는 것과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되어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사상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언약사상이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를 약속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는 언약형식이다. 또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고 복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의 전달자로 삼아서 온 인류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42, 46, 49). 이러한 언약관계는 야훼 하나님이 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 또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양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사랑하는 신부라고 표현되었다.

)종말사상

하나님 되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종말 사상이다. 하나님의 오심은 사단이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2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1. 가까운 장래에 올 하나님 나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주기도문(6:9-13, 11:2-4)’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이다. 주기도문의 세 가지 청원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다. 이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첫 번째 청원이다. 일용할 양식의 공급과 죄 용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결과로 주어지는 복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오도록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강조하였다(6:14-15).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청원에 대한 주해이다. 그리고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의 삶의 근본적 필요들에 대한 실존적 불안에서 재물을 많이 쌓아 그것으로부터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는 태도, 곧 맘몬(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심각하게 경고하였다. 예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자애로운 창조주 하나님의 아빠 노릇에 의지하는 자세, 하루하루 그날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다(6:25-32). 예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6:33).” 라고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을 맺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는 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역동적 의미이고, 하나님 나라의 옴은 아담적 숙명이 뒤집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죄의 용서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은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으로써 인간들은 의인들이 되고 그들의 사회는 샬롬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묘사의 특징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하나님 나라의 것들과 이 세상의 것들을 직접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구체성을 피하여 비유로 말하였다. 예수가 묵시문학의 환상적인 언어와 랍비문학의 물질적 언어를 피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의 신학적인 뜻에 집중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 묵시문학적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어떤 물질적 체계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주로 잔치의 비유, 특히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묘사했다. 잔치는 풍요함, 만족, 기쁨, 사랑 등을 상징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 하나님적 생명, 영생이다. 예수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음의 비유로도 표현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고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벌써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누가복음 11:1422절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에 힘입어 쫓아냈다고 말한다(12:28). 예수는 자신이 초월 하나님의 내재에 작용하시는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치유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왕국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해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 침투하여 사단을 묶었기때문이라고 암시한다. 이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은 후 사단과의 첫 대결에서 이기신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1:1213, 4:111; 4:113). 예수는 자신의 사역 전 과정을 사단과의 투쟁과정으로 보았다.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사단과의 전쟁을 결판낸 승리의 날이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를 병행하였고,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실재가 되게 하였다.

)하나님 나라와 치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 우리의 복음 선포에도 항상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육신의 질병, 갈등의 제거, 경제적 빈곤의 제거, 정치적 억압의 제거 등과 같이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과 샬롬의 상태 속에서 살게 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인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사랑 그리고 내 몸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구로 다가 온다.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때, 만인의 인권도 보장되고, 사회적·경제적 정의도 일어나고, 평화와 자유도 확대되어 우리의 삶이 건전해지고 온전해진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치유다.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키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신앙은 오순절 신학과 같이 오로지 질병을 기적적으로 제거하는 것만 추구하는 나머지 미신화 하는 것도 피하고, 전통적 개혁신학과 같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어버리는 것도 피할 수 있다. 의사의 투약과 수술을 통한 치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통해 심지어 불신자 의사도 사용하신다.

)안식일에 치유하심

예수는 그의 반대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치유를 하려고 하였다. 예수는 사단의 통치 이전의 생명의 충만함 가운데서 있었던 태초의 안식을 기념하며 사단의 통치가 종식되는 종말, 곧 새 창조 때 생명의 충만 가운데 있을 안식을 희구하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이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극복되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시작되어 드디어 진정한 안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곧 종말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가 벌써 시작되어 질병으로 그 증상을 나타내는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이 일으켜지게 되었다는 것을 시위하고자 한 것이다.

 

 

3장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온다는 것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현재에 벌써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예수님은 가르쳤다. 그래서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출범완성의 구도로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벌써 출범한 것이다.

 

 

 

4장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1. 하나님 나라는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과 함께 들어가다받다라는 독특한 동사들을 썼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함께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이루다’, ‘확장하다등의 동사들을 쓰지 않았다. 언어 사용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고자 한 사실을 터득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루고’ ‘확장하는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것이다. 인간의 힘과 지혜를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면’, 그것은 인간의 나라이고, 내재적인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주시는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받는것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것이다.

 

2. 하나님 나라는 초월성과 은혜성이 함의하는 신론

신론은 인도 계열의 범신론(Pantheism), 이슬람교식 신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인도 계열의 신론인 범신론(Pantheism)은 힌두교와 개혁 힌두교로 볼 수 있는 불교가 여기에 속한다. 이들 종교는 신의 초월이 부인되고 내재만 인정된다. 이런 범신론과 그에 따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진 종교들에 있어 구원론은 영겁의 윤회 고리를 끊고 현상으로서의 존재를 마감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하는 자력구원론이다. 그래서 구원은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슬람교식 신론은 범신론과 반대로 신의 초월성만 강조하여 내재를 부인하는 신론이다. 신이 너무나도 거룩하고 위대하므로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신론을 이신론 또는 부재신론이라 한다. 이런 신론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관은 세계는 신이 미리 정하여 넣은 규칙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와 같다. 신이 인간에게 결코 손을 내밀지 않으므로 이슬람교의 구원론은 완전한 숙명론이거나 자력 구원론이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면서 동시에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통치를 펼치는 유일신이다. 그래서 그의 초월의 힘으로 이 내재의 한계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낸다. 이렇게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참 구원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 즉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 존재여야만 하나님은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점진성

예수는 여러 가지 의 비유들을 통해 그 과 실현되어가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특별히 겨자씨 비유(4:40), 누룩의 비유(13:33)가 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그리고 점진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이 또는 큰 반죽 덩어리에 감춰진 누룩 같이 작게 시작한다. 씨 속에 생명이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이므로 아무리 미약하고 사단적 저항이 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다.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연의 확대를 말한다면,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가져오는 질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예수는 갈릴리 어부 몇 명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였다. 유대와 로마의 통치자들을 앞세운 사단의 세력의 극단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자라서 주후 313년에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성장하여 20세기까지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부족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불러 모으게 되었다.

 

4.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전제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예수께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들로 설명한 것은 당시의 열심당적 혁명 운동과 바리새적 경건주의 운동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성전을 펼치고, 정치 경제 및 사회적 혁명을 통하여 다윗적 메시아가 통치하는 신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열심당(Zealotism)에 반대한 것이다. 예수는 그런 정치적 혁명이나 군사적 투쟁으로는 통치자나 압제자, 피치자나 수난자 사이의 자리만 바꿀 따름이지 통치자-피치자, 착취자-피착취자의 불의한 관계 자체를 해결하지 못함을 꿰뚫어 본 것이다. 예수는 이른바 해방신학에 동조하지 않았다. , 예수는 바리새인의 소극적 경건주의도 비판했다. 바리새인의 소극적 경건주의로 자신의 몸과 양심을 깨끗이 유지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 통치의 샬롬이 이루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5. 사랑의 이중계명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온다고 보고, 모든 계명들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였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상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실존에서 하나님을 혼신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요구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가치 판단과 윤리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지 사단의 통치를 받을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것인지 사단의 뜻을 좇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만, 사단은 네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이 되라.”고 한다. 네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너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라.”고 유혹하고, 그러기 위해 결국 이웃을 착취하기를 종용한다.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우상숭배의 형태는 맘몬숭배, 즉 재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태도이다(6:24, 16:13). 맘몬이즘에 빠져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하였다(18:2425).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께 의존하고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면, 부는 비교적 공정히 재분배되어 경제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적 정의는 사회적 평화를 낳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만인이 만인을 섬기게 하여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있는 사회를 이루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하나님의 통치를 받을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곧 하나님의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인간들이 성령에 힘입어 자기주장의 의지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실현된다.

 

 

 

5장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수의 의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루려는 예수의 의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덕 입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게 하는 것,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호칭 등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통치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우는 분이라는 자기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예수는 이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을 상징적으로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여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핵을 삼았다. 그리고 그가 불러 모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여 그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을 누리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로 불러 모은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았다. ‘성전제사를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윤리적 순종에 그림 언어적으로 적용한 에센파 유대 공동체의 전통 위에 세웠다.

그 다음으로 예수는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자신에게 내려와 권능을 받고 너는 나의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체험을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아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신탁(삼하7:12-14)과 그것의 중요한 재해석의 전승에 비추어 해석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치케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신실히 대행하여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소명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6장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1.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고 새로운 성전을 지은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예수께서는 선포를 통해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였다. 구원을 빈 말로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면서 약속하셨다. 나아가 그들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참여할 것 곧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 영생을 얻을 것을 보증해주고, 그것을 체험하도록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하였다.

 

2.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예수는 자신이 이사야 4253장에 예언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여 속죄 제사로 그리고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최후의 만찬에서 '잔의 말씀'으로 말하였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속죄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라는 두 개의 범주로 해석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죄가 씻어져 의롭게 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으로 설명하였다. 그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사건이기에 그것은 종말의 유월절 구원으로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했음을 깨닫게 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성취'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자신의 죽음의 두 단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