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이어, 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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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7장 예수의 죽음
예수는 다가오는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보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그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았고,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이 상징하는 유대민족의 체제가 더 이상 개선할 수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직면해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 성전을 무시해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로 죄인들의 용서를 선언하기도 하고(예 : 막2:1~12 병행구절들), 부정한 자들을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예 : 막1:40~45 병행구절들) 등 성전과 제사장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유월절에는 성전에 가서 그곳에서 제사드릴 제물을 사고파는 일을 방해하기까지 하였다.
예수의 성전 시위를 직접적인 구실로 삼아 사두개인 제사장 무리들은 그를 체포하여 산헤드린 재판에 회부했다(막14:53-64 병행구절). 이 재판에서 대제사장은 사무엘하 7:12~14의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 심문했다. 그것에 근거하여 한 두 질문은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이다. 즉 예수가 새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성전죄목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면 '참람죄'로 사형 언도를 내릴 것이다. 대제사장이 보기엔 빈약한 인간 예수가 메시아 또는 하나님 아들이라 주장한 것이 참람죄가 아니라 성전을 때려 부수겠다고 한 것이 참람죄였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수긍한 것은 곧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약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이므로 성전을 부수어버리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이름을 욕되게 한 죄, 곧 참람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를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그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다윗적 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정치범으로 다루도록 고소한 것이다. 그들이 만일 모세의 법대로 예수를 돌로 쳐 죽이는 사형을 집행한다면 당시 참 선지자는 패역한 백성에 의해 꼭 순교 당한다는 유대 사회에 만연된 사상에 따라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예수를 더욱 추앙하고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게 할 빌미가 될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게 함으로써 신명기 21:23에 나무에 매달려 처형된 자는 하나님이 저주를 받은 자로 인식시켜 예수 운동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8장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부활은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을 빚은 사건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는 다시 산 자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은 그의 옮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하나님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인한 것이고, 자신의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또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예수가 대표했던 신이 스스로를 참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예수의 사건이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부활이다. 왜냐하면 이 예수의 부활사건은 예수의 신 곧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이며, 그 신이 주장하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정한 구원사이며, 그 신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의 모음인 성경이 참 경전이며, 그러기에 그 속에 담긴 약속들을 성취한 예수의 사건이 참 신의 온 인류를 위한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이라는 독특한 사건은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활동한 한 사람, 이 예수를 통해 초월의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밝힌 것이다.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켜 그의 이러한 가르침과 주장을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관심의 초점은 약속을 성취였다. 부활 이후 사도들의 케리그마는 그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의 죽음은 '메시야적 사건' 으로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부활이 증명해주기 때문에 사도들의 선포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9장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1.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메시아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사에서 쓰실 일꾼을 세우는 의식이다. 이스라엘의 왕들, 제사장들, 또는 선지자들이 모두 '기름부음'받아 하나님의 일꾼들도 쓰임을 받았기에 메시아들이다. '메시아'라는 말이 이렇게 쓰일 때는 보통명사인데, 이 보통명사가 중간사 시대에는 유대인들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대가 간절해지면서부터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이루도록 세워질 일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발전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은 예수가 종말의 구원자란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것의 완성을 받으라고 권고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과 구원의 완성을 아직 기다리는 상태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기 위해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당분간 대기하며 쉬고 있는 것으로 그렸다(계 6:9-11).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구원의 “첫 열매”는 그 '영생'에 대한 '보증금'이므로 그 구원의 완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롬 8:18-39).
2. 의인이라 선언함
'의인이 되게 함'은 법정적 그림언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므로 우리가 그 복음을 믿으면 대속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루터와 그에 동조한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의인으로 칭함'의 그림을 단순히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그중 일부는 그것을 단순히 우리 대신 벌 받음이라고 하는 좁은 이해에만 근거하여 윤리를 구원론과 완전히 분리시키는 약점을 보였다. 이러한 오해로 인해 오늘 한국의 개신교들의 기독교적 윤리가 개인 윤리 면에서나 사회 윤리 면에서 아주 미약하게 나타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 특히 '칭의론'으로 표현되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의'는 법정적 개념일 뿐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그리스-로마적 관점에서 단순히 전자로만 이해하였다. 성경에서 '의'란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면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의'를 관계에 신실함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관계를 원만히 지탱하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 원만함은 화평을 가져오는 데 그것이 바로 '샬롬'이다. 만약 관계의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참여자들은 '불의'하고, 그 관계는 갈등에 빠지게 된다.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불의'로 말미암아 갈등의 관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관계로 전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보내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의 '불의(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고, 자신을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는 제사로 바치게 하였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의'의 범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고 말한다(롬 3:21-2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과 사랑하심이란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동의어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함'은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대로 우리를 도덕적인 의미로 '의인이 되게 함'의 뜻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의미로 우리를 '의인되게 함'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인간이 되게 함이다. 사단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다는 말이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했다는 말이다. 그 구원의 완성은 재림 때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곧 '의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바울은 동시에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자신도 위안을 받는다(롬 8:1-39, 고전1:9, 빌1:6).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Gelassenheit)'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의인'의 삶을 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말한다.
3. 화해시킴(Reconciliation)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일어난 구원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자신에게 '화해시킴'이라는 그림언어로도 설명한다(롬5:1~11, 고후5:18~21, 엡211:19, 골1:20~22). 이것은 죄인들로서의 인간들을 창조주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켜 갈등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화목 제사로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갈등을 제거하고 화평을 이룬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화해시킴'도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사도 바울은 이 그림 언어를 에베소서 2:11~19에서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화해됨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됨에도 적용한다. 그리스도의 화목제사는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서로에게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태어난 교회는 하나님께 화해되고 서로에게 화해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화해'의 구원이 개인과 사회 공동체와 민족들 간에, 그리고 온 우주적으로 실재하게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동서화해와 남북화해를 도모해야 할 목회적 과제를 안고 있다.
4.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
성경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선포는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받아 행사하는 분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신약 성경은 이른바 '보냄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도록 보내셨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냄의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신적 구원을 이루었다는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심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게 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갈4:4-6).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같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얻음의 의미한다. 그것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께 대항해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실행은 그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신약 성경은 '내어줌의 형식'으로 표현하였고(요3:16, 롬8:32, 갈2:20, 요일4:10),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초월자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선포를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예수가 주이다.”라는 언어로도 선포하게 되었다(롬1:4).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주이다.”라고 선포할 때, 그들은 예수가 그의 생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만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 이후 현재도 그 주권을 계속 대행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의 성취로 보았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왕의 우편에 앉음은 옛 근동의 궁중의식에서 왕의 권세를 대행하는 총리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우편에 높여 온 우주 위에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다(마28:18). 그리하여 생전에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꺾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부활의 능력으로 사단의 잔여세력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해가게 된 것이다(고전15:20~26).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권의 위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영의 힘으로 이 일을 행한다(행2:33, 롬1:4, 계5:6).
우리가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주권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도 내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그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께 의지함과 그에 대한 순종이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신앙은 미신이고, 그런 미신들은 하나님의 통치나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6. 하나의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하여 포괄적으로 선포하기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의인됨', 하나님과 '화해됨',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됨' 등에 좀 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누가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예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 높임 받으신 분으로서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교회를 통해 그의 구원의 통치를 펼쳐가고 계신다고 선포하는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는 복음 선포 형식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아들로서 하나님의 최종 계시자이며(히1:1~14),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육신 하여 우리의 고난의 처지에 오신 분임을 강조한다.(히2:14~18)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자신을 죽음에 바침으로써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노릇을 하여 옛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고 우리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효과 있게 해결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들어가게 하였음을 강조한다(히8~10장).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대제사장 노릇하고 계신다는 것, 곧 우리의 중보자 노릇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속 남아 짓누르는 죄의식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와 핍박 등에 시달리며 첫 신앙의 열정을 잃고 괴로워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대 제사장의 현재적 중보에 힘입어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 도움을 얻으며 종말의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는 순례의 길을 신실히 가도록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오로지 '보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시대와 처지를 물론하고 오로지 바울의 '의인됨'의 범주로만 이해한다. 그것도 포괄적으로 옳게 이해된 '의인됨'이 아니라 오직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이해된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보수'한다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무시해버리는 우를 범할 뿐 아니라,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리하여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한국의 성도들의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 더 성숙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포괄적이고, 삶의 정황에 적합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해야 할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나의 생각
결국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 핵심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고,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것이 곧 구원의 소식,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부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활을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겠지만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선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원을 확신시켜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완성을 위하여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도 예수의 사건이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부활이다. 왜냐하면 이 예수의 부활사건은 예수의 신 곧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이며, 그 신이 주장하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정한 구원사이며, 그 신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의 모음인 성경이 참 경전이며, 그러기에 그 속에 담긴 약속들을 성취한 예수의 사건이 참 신의 온 인류를 위한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누가와 요한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예수가 사단의 권세를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 높임 받으신 분으로서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교회를 통해 그의 구원의 통치를 펼쳐가고 계신다고 선포하는 데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망과 실재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또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및 윤리를 정립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우리 믿는 신앙인들이 먼저 지교회와 교단과 국내선교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고, 구원사적으로 온 세계를 아우르는 선교사명을 깨닫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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