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동감적 교감을 통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동감의 사회학은 애덤 스미스가《도덕 감정론》에서 제시한 동감 이론을 윤원근 박사가 독자적인 사회학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동감의 사회학이 기존 사회학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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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는 고전 경제학의 창시자 또는 정치. 경제학의 원리를 세운 사람으로 인간사회의 일반 원리를 체계화하려고 했다. 그는 정치. 경제 현상을 전체 사회 질서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면서, 사회 질서의 보편적인 도덕 근거를 밝히려고 하였다. 그는 일차적으로 도덕 사회학자였고 부차적으로만 정치. 경제학자였지만 ‘동감적 존재로서의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사회의 작동 원리를 규명하려 하였다.
1960년대 산업화 세대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의 열매를 먹고 자란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주장하며 산업화 세대에 저항하며 민주화 세대를 이끌었고,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켜 시민 주도의 민주혁명을 이룩하였으며, 1998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화 세대가 정치권력을 잡으면서 민주정부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산업화 세대는 세계화 시대의 무한 경쟁을 직시하라고 외치면서 경제 발전과 효율성 제고를 위한 금욕적. 엘리트주의적 노력을 강조한 반면, 민주화 세대는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내세우며,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아 표현, 동료 인간들 사이의 수평적인 교감과 소통을 중시하였다. 지금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종합을 창출해야 하는 시점에서 인간을 동감적 존재로 이해하는 동감의 사회학은 한국사회에서 이 두 세력의 새로운 문화적 종합을 위한 지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 동감
경험론은 인간이 유한하고 불완전하므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인간의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 이 항상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오류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경험론의 겸손함을 잊어버리고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을 너무 자만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스미스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도덕의 일반 원칙이 감각 경험에 대한 관찰로부터 도출된다고 보았다. 우리는 매우 다양한 개별 사례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즐겁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는 것과 이 도덕적 능력이 시인하거나 또는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도덕의 일반 원칙은 이러한 관찰을 일반화하는 귀납에 의해서 확립 되므로 도덕의 일반 원칙이 도출되는 인간의 경험을 스미스는 ‘동감’이라고 보았다.
동감은 인간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떠받치는 인간학적 토대로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한 요소이다. 동감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국적, 인종, 종교,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느끼는 동료 감정을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상황을 보면 나도 덩달아 기쁜 마음이 생기고, 다른 사람이 슬퍼하는 상황을 보면 나도 같이 슬픈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동감 현상은 특별한 부류의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팔 또는 다리에 칼을 겨누고 막 찌르려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느슨한 밧줄 위에서 춤추는 무용수를 보았을 때, 거리의 걸인들이 내보이는 상처와 종기를 보았을 때 느끼는 순간의 감정들이 동감의 예로 볼 수 있다. 동감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잘 작용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동감의 원리를 파괴하는 가장 큰 요소는 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동감적 반응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들고 비동감적 반응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상대방의 동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공감의 심리학》에서 요하임 바우어는 동감을 인간사회의 중력의 법칙이라고 표현하였다. 스미스는 뉴턴이 발견한 자연세계의 중력처럼 동감이 사회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여기고 이 동감을 중심으로 인간사회의 도덕 원리를 설명하였다.
스미스는 관찰자와 당사자 간의 ‘상상에 의한 입장의 전환’(imaginary change of situation)을 동감의 상호작용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주요 당사자의 감정을 동감하고자 하는 관찰자의 노력과 자신의 열정을 관찰자가 함께 동감할 수 있는 정도까지 억제하려는 주요 당사자의 노력이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관대한 인간애의 덕성을 관찰자의 덕성으로, 자기 부정과 억제의 덕성을 당사자의 덕성으로 보았다. 당사자의 상황에 인간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것은 관찰자의 칭찬받을만한 덕성이다.
이처럼 동감이 보다 잘 일어나기 위해 관찰자의 덕성과 당사자의 덕성이 필요하다면 동감 현상은 사회마다 일률적으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동감이 완벽하게 작용하는 인간사회가 없고, 동감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인간사회도 없다.
2. 동감과 도덕의 일반 원칙
스미스는 일상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의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는 동감하여 인정하고, 어떤 행위들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고 비난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는 효용이나 유용성이 행위나 자질을 인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보다 우선하는 것은 언제나 관찰자가 동감할 수 있는 열정의 강도, 곧 적정성(propriety)에 대한 동감이라고 보았다.
효용이라는 관념은 일이 일어난 후 생기는 생각이며, 처음부터 우리가 시인하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도덕 감정론》1부 1편 4장 4절). 스미스는 항상 적정성에 대한 동감을 도덕적 시인의 일차적인 요소로 간주했으며 신중도 이 한계 안에서 작용해야 한다. 이익을 위해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해서 행동하더라도 행위의 목적과 의도와 수단이 적정성의 정도를 벗어나면 동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스미스는 사람들이 서로간의 행위에 대해 어떤 경우에는 동감하여 인정하고 어떤 경우에는 동감하지 못해 비난하는지 다양한 개별 사례들을 이성으로 관찰해보면 도덕의 일반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모두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서도 대중 속의 타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만약 우리가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타인들에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되는 것(《도덕 감정론》3부 3장 4절)”이 도덕의 일반원칙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 도덕의 일반 원칙이 ‘옳음의 문제’(a matter of right)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a matter of fact)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들이 서로의 행동을 어떤 경우에는 옳은 것으로 시인하고, 또 어떤 경우에 나쁜 것으로 부인하는가를 경험적으로 관찰해서 얻은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 도덕의 일반 원칙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다.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동감에서 유래했다 하여 ‘자연법’, ‘마음의 자연스런 눈’이라고 했고, 그것이 인간의 내면에 각인되어 있다는 뜻에서 ‘양심’, ‘가슴속의 동거인’, ‘내부의 재판관’이라 하였다. 또 나 자신에 대한 타인의 객관적인 시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중립의 공정한 관찰자’, ‘제3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도덕 감정론》3부 3장 4절).
우리는 인간의 직접적인 감정보다는 동감적 감정 현상들에 대한 이성의 관찰을 통해 얻은 도덕의 일반 원칙을 도덕 판단의 궁극적 기초로 삼아야 한다. 스미스는 모든 국가의 실정법이 도덕의 일반 원칙에 일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모든 국가에서는 개인 상호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재판관들이 임명되고 또 그들이 판결하기 위한 원칙들이 미리 규정되는데, 이 규정들은 도덕의 일반 원칙과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정부 권력을 차지한 특정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실정법을 자연적 정의로부터 왜곡시키기 때문이다(《도덕 감정론》7부 4편 36절).
이처럼 실정법을 자연적 정의로부터 왜곡시키면 인간의 도덕 감정은 부패된다. 도덕 감정의 부패는 인간사회 자체의 파괴를 뜻한다. 따라서 ‘도덕적 능력’은 인간 본성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욕구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다른 능력이나 욕구는 도덕적 능력을 억제할 수 없지만 도덕적 능력은 그것들을 억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도덕 감정론》3부 5장 5절).
3. 도덕 상대주의
스미스는 각 문화마다 고유한 도덕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도덕의 일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도덕 상대주의에 찬성하지 않았다. 관습은 도덕 감정보다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미적 감각에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관습이 부당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데도 그것이 공통으로 행해진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감의 원리에서 나오는 인간의 자연스런 도덕 감정이 왜곡된 나쁜 관습을 확인하고 또 이를 곧게 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감정들을 표현하는 공통된 인간 상황에 대한 공통된 반응을 일반화한 것이 바로 도덕의 일반 원칙이다. 정직과 신뢰 같은 도덕 감정은 문화적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속하는 자연스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의 일반 원칙은 이러한 구체적인 도덕 감정들을 포괄하는 가장 추상적인 법칙이다.
컴퓨터와 정보 통신 수단의 발달로 다른 지역의 인간이 경험하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즐거움과 고통을 거의 동시에 경험하고 유사한 감정을 공유하는 세계화의 과정에 있다. 인간사회의 발전은 각자의 사회가 서로 문을 굳게 닫은 채 분절된 사회에서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닫혀 있는 분절 사회들은 자신의 폐쇄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인 헛된 관념과 억압적인 권력을 동원하지만 네트워크로 연결된 열린사회는 자연스런 동감이 가장 중요한 사회유지 원리가 된다.
로버터슨의 말을 빌리면 세계화는 문화의 불일치와 차이를 넘어 전체로서의 세계라는 인식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적 상호의존과 하나로서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며, 이것은 인류가 점점 더 같은 인간으로서 동감의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문화의 불일치와 차이를 넘어 하나로서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양하게 정의되던 인간 개념을 넘어서는 동일한 본성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인간개념이다.
4. 정의의 도덕
1) 인간의 이기적 본성
스미스는 도덕의 일반 원칙이 ‘정의(justice)의 도덕’과 ‘자혜(beneficence)의 도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정의의 도덕’은 다른 사람의 이기심을 나의 이기심만큼 존중해 주어야 하는 도덕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자연스럽게 동감하는 도덕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앞세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무례함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가질 것인데 이 감정을 ‘정의감’으로 불린다. 기독교의 십계명은 인간의 정의감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 그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이기심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앞세우는 과도한 이기심은 악이 된다. 정의의 도덕 테두리 안에서 교환 행위를 통하여 서로의 이기심을 추구하는 것을 비도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중에 가장 도덕적이고 훌륭하고 정의로운 방법은 상호 교환이다. 교환을 이기심의 추구로 보아서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시장을 인간사회의 중요 프로그램으로 보고 이를 정치. 경제학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도덕의 일반 원칙 중의 ‘정의의 도덕’과 관련이 있는 특수사례이다.
2) 생산력
스미스는 인류의 역사를 지배층의 불의한 특권을 정당화하는 통제 체계에서 벗어나 도덕의 일반 원칙에 근거한 정의로운 자유 체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한 사회가 정의로운 자유 체계에 가까울수록 그 사회의 생산력은 커지고, 불의한 통제 체계에 가까울수록 생산력은 작아진다고 하며, 시장의 역할이 정의로운 자유 체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그는《국부론》에서 불의한 통제 체계에서는 도덕이 부패하고 노동 의욕이 감퇴되어 생산력이 줄어들며, 불의가 심할수록 생산력은 더욱 줄어든다고 한다. 그 예로 사회주의는 개인의 사유 재산을 모두 국가가 소유한다는 점에서 전제 군주제보다 더 가혹하고 불의한 통제 체계,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 노예제도를 통한 생산력을 증대의 어려움, 영국의 식민지 무역 독점정책에 대한 비판 등이다.
스미스는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는 자연스런 성향을 갖고 있으며, 이런 성향은 매우 강력한 원동력이므로 그것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추구도록 허용하면 다른 아무런 도움 없이 그것만으로도 사회에 부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따라서 법률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자신이 돌볼 수 있도록 맡기는 방향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특수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입법자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국부론》4편 5장 1절). 정의로운 자유 체계는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동감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동감의 원리에서 도덕의 일반 원칙을 이해하려면《국부론》을 통하여《도덕 감정론》을 보아야 할 것이다.
3) 자유 시장
자유 시장은 평화로운 교환 활동을 통해 이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인간 활동의 마당이다. 스미스는 정의의 도덕을 준수하면서 이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은 동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소극의 동감이 아니라 적극의 동감이며,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과 같이 이기심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인류에게 보다 많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의 도덕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시장 행위자들이 정의의 도덕을 준수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의 도덕을 어기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의 비열한 탐욕과 독점 근성을 이웃 국가와의 분쟁을 일으키는 주범으로 지목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무역을 통한 교류가 개개인과 국민들 사이에서 협동과 우정의 끈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잘못된 행동방침 때문에 오히려 불화와 반목의 원천이 되었다. 금세기와 전세기 동안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의 질투심이 국왕과 장관들의 변덕스런 야심보다 유럽의 평화에 더 치명적이었다(《국부론》4편 3장 2절).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의 독점 근성은 인류의 상식을 혼동시키는 궤변을 만들어내고, 제한 없는 무역을 행하면 무역 수지 적자가 발생해 확실히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장에서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역 수지가 자기 나라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나라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국민감정을 조장한다(《국부론》4편 3장 2절).
4) 정부의 개입
정부의 시장개입은 대체로 상인·제조업자들과 같은 일부의 사람들에게 독점을 허용함으로써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교란시키고 국민 대다수에게 피해를 주었다. 또 정부가 시장 상황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시장 행위자가 갖고 있는 지식이 정부가 갖고 있는 지식보다 훨씬 나은 것이기 때문에 스미스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시장에서 정의의 도덕을 확립하는 것은 정부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의의 도덕을 어기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장 행위에 대해 정부가 적극 개입해서 엄격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장은 기대와 신뢰가 잘 충족될수록 일관성과 안전성을 갖는 것이다. 시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거래를 하고 계약을 맺는 것은 사람들의 행위가 규칙성을 갖고 일어나리라는 기대와 신뢰 때문이다. 시장이 정의의 도덕이라는 기본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만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풍요와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다.
스미스는 시장에서 정의의 도덕이 잘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과 같이 문제의 여지가 많음을 알고 있었다. 시장에서 자본가는 숫자가 적어서 쉽게 단결할 수 있고, 법률이 자본가에 유리하게 되어 있고, 자본가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훨씬 오래 버틸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단지 시장에서 정의의 도덕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 중립적인 관찰자였을 뿐이다.
5. 자혜의 도덕
1) 인간의 이타적 본성
‘자혜의 도덕’은 나의 이기심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도와주어야 하는 도덕으로 자비심과 같이 약한 자와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도덕규범이다. 도덕적 행위는 교환의 방법이 아닌 내 손에 있는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내어주는 것이다. 정의의 도덕 못지않게 인간의 사회생활에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 자혜의 도덕이다.
기독교의 위대한 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위대한 계명인 정의의 도덕은 다른 사람의 이기심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성격을 지닌 도덕이고, 기독교의 위대한 법인 자혜의 도덕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준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 도덕이다. 정의의 도덕을 어기면 타인에게 직접 손해를 끼치기 때문에 강제력을 사용해서 그것을 지키도록 해야 하지만, 자혜의 덕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힘으로 강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혜의 부족은 적극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사회가 항상 서로를 해치고 상처를 주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립할 수 없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가해 행위가 시작되고, 분개와 증오가 나타나는 순간에 사회의 모든 유대 관계는 깨어지므로 인간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정의가 자혜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2) 정부의 개입
스미스는 이론적인 면에서 정의의 도덕을 정부의 엄격한 관리 영역으로 삼고, 자혜의 도덕을 개개인의 자율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보았다(《도덕 감정론》2부 2편 1장). 자혜의 도덕은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정부기구(NGO)나 비영리단체(NPO)를 만들어 담당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면에서 자혜의 덕을 정부의 영역 밖으로 완전히 방치하지 않고, 사회의 상태에 따라 정부가 자혜의 덕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스미스는 사회의 대부분의 개인들이 필연적으로 국가가 요구하는 능력과 덕목을 거의 모두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의 타락과 퇴보를 막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여 돌볼 필요가 있다(《국부론》5편 1장 3절). 그 이유는 분업의 나 결과로 노동 빈민이 지식·정신면에서 무능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과 의무 교육제도를 통해 가난한 서민층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이다(《국부론》5편 1장).
3)정의의 도덕과의 관계
정의의 도덕과 자혜의 도덕은 긴밀하게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지 못하도록 서로 견제하면서 사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관계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자연스런 동감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사회가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한 도덕적 환경이다.
정의의 도덕은 강자의 무절제한 이기심을 철저히 감시하고 공정한 교환이 일어나도록 하며, 정의의 도덕 한계 내에서 이기심의 추구를 허용하여 국가의 부를 증대시켜주고, 인간의 이타성을 적극 방임하여 약자를 배려하므로 엄격한 정의와 따뜻한 자비가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사회를 지향하게 해 준다.
따라서, 정의의 도덕과 자혜의 도덕은 인류전체를 포함한 모든 인간 사회의 건강을 위하여 동감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도덕적 환경이다. 도덕적 환경에 먼저 적응해야 할 인류는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위해 물리적 환경에도 적응해야 한다. 만약 현실 사회가 이러한 도덕적 환경을 무시한다면 그 사회는 발전과 풍요를 잃게 될 것이다.
6. 결 론(과학적, 상담학적, 사회학적 관점의 인간)
기독교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된(창1:27) 몸과 마음과 영으로 구성되는 분리할 수 없는 전인(whole being)으로 인식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형상을 갖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본보기로서 도덕적 유사성과 영적 유사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몸과 마음과 영, 자연 및 하나님과 사이의 조화와 질서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완성과 온전함은 창조 당시의 인간 존재보다 더 성숙하고 고차원적인 상태로의 회복됨을 의미하였다.
과학적인 관점에서의 인간에서는 인간의 존재와 의미를 동시에 파악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는 총체적인 인간의 정의를 내리는 것에는 과학적 탐구의 한계가 있었다. 이전에는 인간의 본질과 기원에 대하여 신학적, 철학적 탐구를 지속하여 왔지만 과학적 인간관은 인간을 물질세계의 한 부분이며 인과론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관찰하고 측정하여 수량화할 수 있는 특성들만을 탐구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관찰과 측정을 가능케 하는 창의적이고 새로운 과학적 관점의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의과학적 관점에 대한 이해와 연구, 특히 거시적 관점의 천체와 미시적 관점의 인체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상담학적 관점에서의 모든 사람은 상호관계성을 형성하면서 자기중심의 인간관계를 설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부수적인 사람으로 받아 드려서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인식하여 사람을 표면적으로 판단함으로 상처를 받게 되고, 공감을 가지지 못하는 인간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대인관계를 형성할 때 협력과 수평관계가 이루어지고 인간 존중과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상담은 모두 인간의 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인간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마음에 악한 계획을 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예수)이 죽으시고 인간을 살게 해주신 사건이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으므로 성경적 상담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할 실존이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의 상담을 바탕으로 실제 인간사회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회와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과 연관된 상담적용에 대한 연구가 부족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인간에 대하여 동감적 교감을 통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 인간을 이해하였다. 애덤 스미스가《도덕 감정론》에서 제시한 동감 이론을 중심으로 동감과 도덕의 일반 원칙을 통하여 인간은 동감적 존재이며, 동감의 사회학이 기존 사회학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를 도덕의 일반원칙을 통하여 인간사회의 작동 원리를 규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의의 도덕과 자혜의 도덕은 인류전체를 포함한 모든 인간 사회의 건강을 위하여 동감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도덕적 환경에 먼저 적응해야 하며,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위해 물리적 환경에도 적응해야 한다. 현실 사회가 도덕적 환경을 무시한다면 그 사회는 발전과 풍요를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상담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는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과 성품을 닮은 영적 존재이며, 인격을 가진 철저한 인간이며, 사회와 과학적인 인간 구조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회적 존재로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만물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 갈 때에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전인(holistic person)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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