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이분법과 삼분법(영, 혼, 육)을 주장하는 이론들의 범위 내에서 영에 대한 다른 시각과 한계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인간의 구조와 성경의 관점에서본 인간 구조는 다르게 보아야 한다. 특별히 인간 구조의 한 요소인 영의 영역에 있어서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으로 구분해 보았다. 또한 인간의 구조에서 환경(공동체)의 필요성을 새로운 패러다임(영, 혼, 육, 환경)으로 제시해 보았다.
1. 몸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breath of life)를 코에 불어 넣을 때 생기가 영(사람의 영)이 되어 몸에 접촉되자 혼이 생겨났다.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말씀은 영과 몸의 결합으로 혼을 생겨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영과 마음과 몸에서 완전히 융합된 것을 말하며, 영·혼·육이 하나로 되었고, 혼은 사람의 개성의 원인, 별개의 독특한 존재로서의 근원이 되었다. Watchman Nee는 “육이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경우로 일반적으로 말할 때 육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인간의 몸을 뜻한다. 그리고 육이 ‘인류의 전체성’을 가리키는 경우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육으로 태어났으므로 온 인류는 육적이다”고 하였다. Kenneth Hagin은 “몸은 겉 사람이고 물질적이며, 우리가 사는 집이다” , “몸은 새 것이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새 몸을 가질 것이다” 고 하였다. 성서에서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몸은 삼분법에서의 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몸을 총체적 치유의 관점으로 보았으므로 좀 더 세분화 하였다. 생리학은 정상적인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배우는 학문이다. “몸의 정상적인 기능은 감각 기관을 통하여 몸 밖의 세상을 인식하여 그 정보를 마음에 전달한다. 반대로 마음(혼)의 결정을 몸 밖으로 시행하는 기능이 있다” 고 하였다. 몸은 성령의 지배 하에서 사람의 영의 통제를 받지만, 성령이 사람의 영의 통치를 거치지 않고도 통제할 수 있다. 주로 의학적 돌봄의 관계에서 작용하며, 1차적으로는 목회적 돌봄과 사회적 돌봄의 역할이 요구되지만, 2차적으로 심리·상담학적 돌봄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몸의 환경적 상태에 따라 그 역할과 작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기초가 되는 영역 때문이다.
2. 마음
사람의 주된 요소는 마음(정신)이다. 마음은 영이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달해 주도록 영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은 마음(정신)이 온전해지면 자신이 달성한 것을 몸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몸 또한 성령의 온전케 하심에 참여하여 신령한 몸이 되기 위한 것이다. Kenneth Hagin은 “혼(soul)은 지성이다. 그것은 감성이며 의지이다. 그것은 사람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영역(the mental realm)을 다룬다”고 하였다. 바울은 몸을 가지고 할 일과 마음을 가지고 할 일을 말하였다. 성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하여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과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Kenneth Hagin은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방법으로 새롭게 되는데 우리의 개인적인 연구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과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교사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여 말씀의 힘과 지식에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마 6:20)고 하셨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마음(정신, 혼)은 삼분법에서의 혼과 같다. 마음을 총체적 치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려면 성령과 사람의 영의 지배 하에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사람의 영의 통제를 받지만, 성령이 사람의 영의 통치를 거치지 않고도 통제할 수 있으며, 주로 심리·상담학적 돌봄의 관계에서 작용한다. 1차적으로는 몸과 같이 목회적 돌봄과 사회적 돌봄의 역할이 요구되지만, 2차적으로 의·과학적 돌봄에서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마음의 영적 상태나 환경적 상태에 따라 그 역할과 작용이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몸의 질병으로 오는 영향도 있기 때문에 총체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마음 또한 삶의 기초가 되는 영역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3.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
1) 영(사람의 영)
3차원을 넘어서는 세계가 4차원적 생명 세계로 영적인 차원이다. 영적인 차원은 이전의 모든 차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긍정하면서 앞의 세계를 넘어서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차원이란 이전의 세계가 가진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세계들을 보완하며 통전하고 완성하는데 이 차원은 성령이 역사하는 영역이며, 인간이 성령의 역사에 응답할 수 있는 차원이다”고 하였다.
성서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는 말씀에서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는 의미를 볼 때, 사람은 땅의 흙과 하나님의 생기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만드셨다. “네페쉬는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영혼의 능력을 모두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진흙 형상이 생기를 부여받아 생존한 것이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 되었다(고전 15:45). 이 말씀은 인간의 상태가 아담의 인격 안에서는 완전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거듭나서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고유한 은혜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언급한 것 뿐이다.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인간의 생명이 단지 '세상적인' 것으로서 확고하고 안정된 일관성이 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담은 타락 이전의 사람으로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것이며, 아담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도 없고,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영(사람의 영)과 정신과 육체로 구성된 흠 없고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셨다. 본 글에서는 성령(하나님의 영)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임을 전제로 하여 생령이라는 의미를 영(사람의 영)과 성령(하나님의 영)으로 구분해 보았다. Kenneth Hagin은 “사람은 동물과 같은 부류가 아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부류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이시듯 인간도 영이다”고 하였다.
타락 전의 아담은 흙과 생기를 통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사람의 영)이 생성되었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육체와 정신과 영(사람의 영)은 100% 성령(하나님의 영)에 통치를 받았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영(사람의 영)을 자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성령(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는 영(사람의 영)이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고, 정신은 육체를 통제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자유를 누리다가 타락과 동시에 성령(하나님의 영)은 영(사람의 영)과 단절되어 영(사람의 영)과 교통함이 끊어졌다. 성령(하나님의 영)의 통치는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므로 성령(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고 있는 육체와 정신이 영(사람의 영)을 통하여 성령(하나님의 영)의 일부분 자각을 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며, 성령의 교통함이라고 보는 것이다. Watchman Nee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과 우리의 영을 구별하지 않으신다. 성서 속에는 ‘영’이라는 말씀이 우리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인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곳이 많이 있다”고 하였다. NIV성서에는 사람의 영을 영(spirit; 히 4:12), 사람의 영혼(the spirit of a man; 잠 20:27), 각 사람의 영(every human being; 롬 2:9), 내 영혼(my spirit; 눅 1:46), 너희의 온 영(your whole spirit; 살전 5:23)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지만, 대체로 성령을 ‘the Holy Spirit’로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있다. 모태에 있는 태아와 같이 분명히 한 몸이지만 태아의 영과 혼과 육은 모태의 영과 혼과 육과 엄연히 다르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된 사람도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을 때에는 성령(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사람의 영)과 혼과 육이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창 2:9)는 생명만 연장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창 3:22)한다는 표현으로 보아 아담에게 불어 넣었던 생기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타락 전의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인식을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가 생명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창 3:24) 것이다. 만약 생명만 연장해 준다고 한다면 먹거리를 통하여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었으므로(창 1:29-30)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생명나무 열매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기능, 즉 전자 제품의 초기화나 컴퓨터의 포맷(format)과 같은 기능을 가졌다고 본다. 이러한 기능은 성령(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몸과 정신과 영(사람의 영)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담을 만드신 후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거듭남도 영(사람의 영)과 성령(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완전한 사람 아담은 결점이 없고, 파괴되지 않았고, 온전하고 깨끗하여 거듭남이 필요 없이 창조되었다. 하지만 죄성으로 타락하여 파괴되고, 손상되고, 부패하여 더러워졌기 때문에 회복이 필요하고, 거듭남이 필요한 것이다. 원래 성령(하나님의 영)이 통치하던 상태로 돌아가려면 영(사람의 영)이 성령과 교통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매개가 있어야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비로소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엡 2:8),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살후 2:13) 하셨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요 3:3),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벧전 1:3) 하시는 것이다.
2) 성령(하나님의 영)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적용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다. 성령(하나님의 영)의 역할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행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도록 하며, 양심, 계시, 영적인 직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전까지 우리 영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지만 사탄을 향해서는 살아있는 것이다. 무당이나 마법사들은 특별히 사단을 향하여 활발하게 살아있는 영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악한 쪽으로 영이 발달하여서 사탄과 연결되어 사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람은 오직 자기 영으로만 성령(하나님의 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님은 우리를 다스리게 되고 그의 영은 그의 혼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며, 혼을 통해 그의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영은 양심, 직관, 영교(communion)의 중요한 기능이 있다. 양심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분별기관이다. Hendrikus Berkhof은 “성령은 하나님께서 창조와 재창조 중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숨이다”
, “그는 영이시므로 보이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계시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데 인간의 마음 속 깊숙이에 계시며 누구나 그를 발견할 수 있는 분이다”고 하였다. 사람의 영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하나님께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고 존재하신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가 지상 생활에서 시작했던 것들을 세계적 규모로 확대해 가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성서에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고 하였다. 삼분법에서의 영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영(사람의 영)과 성령(하나님의 영)으로 구분하였다. 총체적 치유의 관점에서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며 질서와 창조의 주체가 되신다. 영(사람의 영)은 마음과 몸을 모두 포함하며, 스스로 성령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성령의 통치에 의해서 모든 돌봄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4. 환경(공동체)
총체적 치유 관점에서의 환경은 “치유 대상으로서의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부를 때 이 사회라는 개념 속에는 인간 공동체와 환경(environment), 그리고 자연을 포함하여 말한다”고 보았다. 본 연구에서 환경이 인간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임을 제3장 2절에서 4가지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의·과학적 관점에서 가시적이고 실체적인 몸을 주체로 하여 이분법과 삼분법으로 보아왔던 철학적 관점은 인간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영혼과 육이나 영과 혼과 육으로만 인간을 한정짓는 의·과학적 사고는 동물을 다루듯이 개체의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을 진화론에서의 동물과 같은 종의 개념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본질적 구조를 새롭게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환경이 영(사람의 영)이 활동하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아담을 창조할 때의 영(사람의 영)은 성령(하나님의 영)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다. 영(사람의 영)은 항상 성령(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환경을 배경으로 영(사람의 영)이 활동하였다. 단지 영(사람의 영)은 단독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고 마음과 몸을 통제하는데 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타락과 함께 영(사람의 영)은 성령(하나님의 영)과 분리되어 몸과 마음이 있는 곳으로 한정적인 활동만 하였고, 영(사람의 영)의 입장에서 성령(하나님의 영)을 깨닫지 못 하거나 분별하지 못 하며, 일방적으로 성령(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에만 영(사람의 영)이 반응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본래 완성되지 않은 공허한 땅을 완성하고 채우는 과정에서 여섯째 날에 사람의 창조와 함께 완결되고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제부터는 본질상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을 발전시켜야 할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지배는 자연계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문화와 사회의 영역에서는 매개적이다.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땅을 지배하고 규범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전시키시는 땅을 지배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 동물과 식물과 광물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면 문화를 이루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사회와 공동체에 부과된 창조의 법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영역을 바다와 하늘과 땅의 구역으로 만드시고 각 구역을 물고기와 새와 육지 동물로 채우셨다. 성서는 창조된 우주를 자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셨다”(출 20:11, 시 24:2, 행 14:15), 또 “오직 사람만이 온 땅을 채우고 모양을 부여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오직 사람에게만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첫 아담은 땅에서 나왔고,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창 2:515) 하셨다. 사람이 땅을 채우고 정복하는 일의 패러다임이 시작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첫 번째로 결혼한 부부로서 사회생활의 시초를 상징하고, 동산을 돌보는 그들의 임무는 문화생활의 시초를 상징한다.
Wolters·Michael W. Goheen은 “창조 세계란 한 번 만들어진 다음에 고스란히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는 인간을 통해서 성장하고 개발되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 속에 함축된 발전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창조를 발전시키라는 명령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계획하셨던 발전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인류가 아담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발전하도록 계획하셨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환경(공동체)은 “비록 낙원은 아니지만 죄로 인하여 저주 받은 땅에서 땀 흘리고, 산고를 겪으면서 살아가야할 터전이다. 이 자연과 문화와 사회 공동체인 환경을 인간의 구원과 완성을 위하여 만들어 두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의 산물이다”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출 4:1-2)고 하였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단위가 가족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 공동체를 최고의 사회적 집단 모델로 이해하여 족장시대를 열어가게 하셨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느 9:7),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느 9:8) 가족 공동체에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이끌게 하셨다.
Hendrikus Berkhof은 “바울에게 있어 몸이란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존재, 성체의 몸, 또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교통함으로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교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서로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명령이다. 우리의 가족, 교회, 사회 공동체와 같은 삶의 환경을 사회적 존재로 그 기능을 인식할 때 하나님과의 교통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정병기는 말하기를 “사람이 자연 환경을 무시하면 자연 환경은 사람을 무시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셨다. 청지기의 역할을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지 사람의 뜻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준 것처럼 자연에도 법칙을 만들어 자연 법칙과 규범 안에서 통치하였다. “자연 법칙과 규범들은 모두 물체와 동식물 영역의 규칙적인 질서에 의해서 존재한다. 상대성이론, 중력의 법칙, 운동의 법칙, 열역학의 법칙, 광합성의 법칙, 유전 법칙 등과 물리학, 화학, 생물학, 그 외에 다른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모든 자연법을 포함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직접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므로 인간이 미칠 수 없는 영역도 존재하는 한계성을 가진다.
성서의 중심은 창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법이다. “우리는 타락이 지상에 속한 창조의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죄는 창조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창조 세계의 기생충이라는 사실, 죄가 온 땅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모든 사물을 더럽게 만들어 ‘세상적인’, ‘세속적인’, ‘땅의’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 그 결과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이 구속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울부짖게 되었다”는 것이다. Dietrich Bonhoeffer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의 심장이다. 이미 알려진 그리스도는 자연 속에서도 인식될 수 있는 분이며, 그리스도만이 자연에 의미를 주고 희망을 준다”고 하였다. 우리의 존재 속에서나 역사의 목적 속에서나 피조물의 의미 속에서 언제나 현존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로 하여금 발견케 해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상공간(Cyber Space)은 인터넷이나 PC통신 등과 같은 통신망을 통해 대량의 정보가 교환되고 공유되는 공간이라고 한다. 컴퓨터, Tablet PC, 스마트폰 휴대전화 등을 통해서도 접속될 수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와 같이 대화, 편지 주고받기, 쇼핑과 은행 업무는 물론 가상의 화폐를 이용한 상거래, 휴식과 여가를 즐기기 위한 다양한 문화 활동 및 교육 활동까지도 가능하다. 가상공간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크게 줄여서 생활패턴을 변모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가상공간에 대한 중독현상, 정보편차에 의한 빈부격차, 무분별한 정보의 범람 등 경제·사회적인 부작용 문제도 제기된다. 이러한 가상공간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며 인간에게 부여된 환경의 하나로 하나님의 영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5. 결론
그러므로 사회 공동체, 자연, 가상공간까지 환경으로 보아야 하며, “주님의 사역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갈등을 치유하고 조화를 이루어 총체적이며 온전한 구원사적 치유와 성화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김찬기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가정, 교회, 선교 단체들은 주권자가 되신 하나님에 의하여 영적으로 내어나며 동시에 영성을 지닌 공동체로 성숙해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공동체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거룩한 영적 공동체가 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의 환경은 삼분법에서의 다루지 않은 영역이다. 총체적 치유의 관점에서 환경은 영의 통치 하에 있으며 삶의 기초가 되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창조물과 하나님 나라를 포함한다. 인간에 의해 오염되기도 하고, 인간을 치유하기도 하는 영역이다. 주로 C의 영역을 통하여 사회적 돌봄의 관계로 작용하며, 환경 내에 있는 마음은 심리·상담학적 돌봄, 몸으로는 의·과학적 돌봄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환경의 영적 상태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해 그 역할과 작용이 달라지는 많은 변화가 있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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